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전과 == >내 배에서는 순천 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 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 ----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8일 놀랍게도 난중일기에서는 조선 수군의 피해는 좌선에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좌선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장선만의 피해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과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냥 왜군들이 좌선한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거라고 믿을 전과다. 실제로는 전투 중반까지 좌선 혼자서 밀려드는 적선 수십 척을 상대로 2~3시간을 싸웠음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해전 전체에서 이런 사상자가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외에도 실제로 접전이 벌어진 안위의 배에서는 사상자가 다수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난중일기에는 거제 전선의 격군 5명~6명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생각하면 사실상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날 적선 31척을 부수었다고 하였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는 전투 전반부에 20척, 후반부에 11척을 각각 격침시켰다고 썼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피해는 이렇게 단순히 31척으로 알려졌다. 실록에도 '적선 31척을 격침하고 수급 8개를 취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순신이 눈앞에서 확인한 전과만 적은 것이고, 다른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실제 전과는 더 컸을 가능성도 있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은 주로 난중잡록에 의거한 것이고, 133척 중에서 10척만이 온전히 살아 돌아갔다면 사실상 출전한 일본 주력함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조선수군이 굳이 고군산도까지 후퇴할 이유가 없으며, 일본함대가 전라도 남서부 해안가를 유린할 상황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난중잡록 자체는 기록유산으로써 인정받지만, 주워들은 이야기까지 쓰는 등 불확실한 부분도 많다. 그리고 명량해전 직후 일본 함대는 벽파진에서 멀뚱거렸으므로 이순신 장군이 전과를 작성할 시간은 있었다고 본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패배하여 도망치는 적병의 뒤를 쫒아 목을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 급이고 무사히 탈출한 적선이 겨우 10여 척뿐이었으며 아군의 배는 모두 무사하였다.'고 적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적의 배는 겨우 10여 척이 도망쳤을 뿐이고 우리 배는 모두 무탈하였다.'고 기록했다. 10여 척만이 도망친 것은 다소 과장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만큼 일본 측 피해가 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니면 선발대 133척에서 피해 없이 본대에 재합류한 병력이 10여 척이라는 내용을 두루뭉술하게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이는 당시 일본 수군의 피해 상황에 대하여,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명량 해전까지 종군한 조선인 포로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저는 지난 임진년(1592)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 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2월 11일 - 선조실록 선조 31년 2월 11일자 기사에는 임진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무술년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렸다. 이 증언에 의하면 전풍상은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했는데, 산도는 정유년(1597) 6월 적선 120여 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 해전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전풍상 이 사람은 칠천량과 명량이라는, 조선 수군의 극과 극을 모두 보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다. 산도의 배가 120여 척이라고 해도 이것은 전투선만이 아니라 사후선을 포함한 비전투선을 합한 수치일 수도 있다. 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실록의 해당 기사만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 강항의 [[간양록]]에도 칠천량 해전과 명량 대첩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 포로의 기록이 나온다. 그 포로가 증언하기를, '왜장 여럿이 서해를 따라 올라가 우수영으로 향했는데, 이순신이 전선 10여 척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했다. 왜장 내도수(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죽고, 민부대부(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며, 그 나머지 휘하 장수들도 죽은 사람이 여럿'이라고 했다.[* <고산공실록>과 같으므로 매우 신뢰성 높은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강항은 정유년에 쳐들어온 왜장들의 명단을 보면 진도까지 왔다가 배에서 사망한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증언으로도 구루지마 휘하 병력 이외에도 일본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일본군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을 살펴보자. >先手の船ともハ敵船にあひ手負あまたいでき申し候。中にも来島出雲殿, 討死にて御ざ候。其の外ふね手の衆めしつれられ候。家老のもの共も過半手負い討死に仕り候処に、毛利民部大夫殿, 関船にて、番船へ御かゝり成され候. >ばん船へ十文字の鎌を御かけ候処に、ばん船より弓鉄炮は撃ち申し候に付き、船をはなれ海へお入りなされ、危うく候処に、藤堂孫八郎、藤堂勘解由両人船をよせ、敵船をおいのけ、たすけ申し候。 >朝の五時分より酉の刻まで御合戦にて御座候。港の様子、ばん船能く存じ候に付き、風を能く見すまし、其のせと口をぬけ、津をひきかけ、はしらせ申すについて、是非なく追っかけ申す儀もまかりならず、和泉様も手をニか所, 負はれ候. >선봉의 배들은 적선을 만나 부상자가 숱하게 나왔다. 그 중에 특히 구루지마 이즈모노카미(来島出雲殿)[*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무가관위가 이즈모노카미(出雲守)이다. 간양록에서 '내도수'라고 한 것이 이와 관련이 있다.]님은 전사하고 말았다. 그 밖에 '''선수(船手)'''[* 주사, 즉 수군을 말한다. 이 수군이 격군을 포함했는지, 아니면 갑판의 아시가루와 무사 등 전투원만 일컫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선조실록에 실린, 일본 수군에게 잡혀 명량 해전에 참전한 조선인 포로가 '울돌목에서 통제사와 접전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말한 증언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도 함께하였다. '''[[가로]](家老)'''[* 일본에서는 봉건 체제에서 [[다이묘]]나 [[소묘]]의 중신(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을 가로라 칭한다.]의 과반수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으며 모리 민부다이부 님(毛利民部大夫殿)은 세키부네(関船)에서 적의 판옥선에 십자 낫을 걸고(도선) 공격했으나 판옥선에서 화살과 철포를 퍼부어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에 빠져 위험에 처해 있던 것을 도도 마고하치로(藤堂孫八郎), 도도 가게유(藤堂勘解由) 두 장군이 배를 대어 적선을 쫒아내고 구해내었다. 아침 5각 반[* 현대의 시각으로 아침 9시.]부터 유시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항구의 상태는 판옥선들이 잘 알고 있었기에, (조선 수군이 잘 아는 항구 쪽을 피해서) 바람을 잘 파악한 뒤 그 물목을 빠져나와서 만에 배를 대고 도주했는데, (조선 수군 쪽은)어쩔 수 없이 추격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이즈미노카미 님(和泉様)[* 도도 다카토라. 그의 무가관위가 이즈미노카미(和泉守)이다.]도 손에 두 군데 부상당했다. >ㅡ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일본군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는 고산공실록에서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적었다. 히데요시를 대리하는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까지 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보면 후방에서 보호받아야 할 인물들까지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와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의 전투 보고서에는 모리 다카마사와 도도 다카도라 휘하의 함선이 직접 적을 공격했다가 함선이 좌초, 모리 다카마사 본인은 도도 수군의 배가 구원하여 살아났다고 서술한 점을 들어 이들도 교전 당사자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이는 반만 맞다고 하겠다. 공을 세운만큼 명성과 보수가 돌아오는 일본 전국 시대의 특성상 군감일지라도 수군을 감독하지만 않고 휘하 부대가 직접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논공 행상에 참여할 다이묘에 대한 철저한 보호라는 일본 전국 시대의 또다른 특성[* 근대까지의 해상전에서는 시야 확보와 가장 좋은 설계를 적용한 기함이 지닌 우수한 전투력을 활용하기 위해 [[기함]]이 함대 대열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전국 시대 일본 수군만은 기함이 최후방에 배치되었다.]을 감안하면, '(다이묘를 보좌할)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는 말이나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가 물에 빠졌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조선 수군의 공격이 철저히 보호되는 일본 수군의 최후방까지 덮쳤다고 보는 게 맞는다. 따라서 격침을 확실하게 확인한 적선의 수만 31척이고, 명량 대첩의 참패로 인한 일본군의 전체적인 손실은 그 이상으로 컸다. 침몰은 면했다고 하더라도 승선 인원이 몰살당하거나 큰 부상을 당하여 전투 불능에 빠지거나, 혹은 함선의 손상이 너무 커서 수리에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수리 자체가 불가능해서 기껏 퇴각해놓고도 폐기 처분해야 할 선박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명량 대첩 이후로도 조선 수군이 전력을 재건하는 동안, 일본 수군이 정면에서는 수효가 한참 부족했던 조선 수군에게 대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따져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격침 31척이란 전과 자체만으로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결과이다. 이는 임진년 때 조선 수군이 기습 공격과 신무기(거북선)의 투입을 통한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교전을 벌인 [[옥포 해전]],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시의 전과와 맞먹는다. 게다가 전투의 상당 부분을 통제사 좌선 1척만으로 치른 점을 감안하면 이는 더더욱 놀랍다. 쉽게 생각해서 배를 군인으로 바꿔보면 133명이 편제된 전투 집단에서 사망자만 해도 31명이고 부관은 전사하고 지휘관도 중상으로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패주했다는 뜻이 되는데 이는 당연히 '''[[전멸]] 판정'''이다. 일본군의 인적 손실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세인들의 인식과 달리 실제 미군 교범에서는 총 전투원 중 부상자를 포함하여 15~30% 가량 전투불능이 될 경우는 병력 재편성을 위해 후퇴해야 하고, 그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면 나머지 전투원 개개인의 육체적 건강 여부를 떠나서 더 이상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져 부대가 전멸한 것으로 본다. 상당수의 인원이 전사했고 거기에 더해 중급 지휘관들인 가로의 절반이 사망 혹은 부상으로 전투불능이 되었다.[* 위에 나온 [[전멸]] 항목에서는 지휘관과 부관이 피해를 입으면 병력 손실이 '''10%'''만 되어도 전멸로 칠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133 가운데 31이라는 건 '''20%'''가 넘는 수치이다.(!!!) ] 또한 일본의 수군은 주로 지방의 해적 세력으로 구성된 독립적 봉건영주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타격은 더욱 컸다. 일본의 수군은 몇 안 되는 해적 세력('스이군' 혹은 수군)에 의존하고 있었고, 구루지마 같은 군소 다이묘에게 도요토미 성씨를 내리는 파격적 조치를 한 것도 그 수군 세력이 바다 건너에서 싸우는 임진왜란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드물게 해전의 노하우를 가진 수군 세력의 장교단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다이묘가 죽었다. >근래 또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치계하길, "한산도에서 패배한 이래로 병선과 무기가 흩어져서 거의 사라졌는데, 신이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자니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을 거느리고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과 교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는데,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부수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아 적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머리를 벤 것도 8급이었습니다. 적선 가운데 큰 배 1척이 있어서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푸른 비단 장막을 둘렀으며, 적들을 지휘하여 아군 전선을 에워싸므로 녹도 만호 송여종과 영등포 만호 정응두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격파하자 적이 크게 꺾이어 남은 적들이 멀리 물러났습니다. 진중의 항왜가 홍기를 단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하였습니다. 획득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 금의(錦衣), 칠함(漆函), 칠목기(漆木器), 장창(長槍) 두 자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소방(小邦)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을 조금 꺾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0일 기사 선조가 명나라 측에 명량 대첩의 승전 소식을 알릴 때의 기사이다. 어떻게든 이순신과 명량 대첩을 깎으려고 드는 선조의 태도가 드러나 있는데, 분명히 명량 대첩을 두고 작은 승리로 적의 예봉이 조금 꺾였다고 하면서도, 이로 인해 '적선이 서해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단언하는 앞뒤가 안 맞는 언행을 보여준다. 뭐 이 발언 자체는 꼴에 예의 차린다고 겸양하는 걸로도 볼 수 있지만, 이 시기의 선조는 명의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이순신의 명량 해전의 전과를 폄하하고 다니기 바빴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근성이다-- 오히려 명나라 경리 양호[* 이 사람은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에게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내어 표창하며 "배에다 괘홍(붉은 비단을 내걸어 축하한다는 뜻)하는 예식을 올리고 싶으나 길이 멀어 가지 못한다." 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또 1598년에는 선조에게 이순신의 벼슬을 올려주라고 압박할 정도로 이순신을 좋아하던 장수이다.]가 선조를 타이르고 이순신은 뛰어난 장수라고 이야기하며[* 양호가 선조와 만나자 선조는 '경리님 덕분에 나라를 구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조촐하지만 받아주십시오.'라며 큰 선물을 준비했는데, 정작 왜군들과 싸워 공을 세운 것은 조선 관군들과 의병들인지라 아무리 외국에서 온 명나라 양호라도 함부로 받을 수 없어 거절했으며, 양호가 이순신의 명량 해전 승리를 경축하기 위해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선조가 "그건 장수들이 마땅히 해야하는 일인데 왜 그런 상을 내렸습니까?"라고 따지자 양호가 반박한 것이다. 명량 해전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승리라 명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될 정도인데, 양호 입장에서는 막상 그 이순신의 상관인 왕이 그의 공적을 깎아내리니까 화가 난 것이다. 명군의 입장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어 수송로가 확보되고 조선이 패배하면 곧바로 자신들에게 칼날이 들어오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어떻게든 조선을 방파제로 일본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순신이 오히려 13척으로 수백 척이나 되는 대규모 함선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 것도 모자라 왜군 지휘관 여러 명을 전사시켰으니, 이순신은 기적을 일으켜 수많은 명나라 장병들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 된다. 소설로 써도 작위적이라 불려도 할 말 없을 정도의 전과를 알리는 소문이 안 나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선조가 이순신의 전과를 폄하하니 명군은 "당신은 말하는 것이 마치 '명군도 거기 있었으면 더 크게 이길 수 있었는데 명군이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만 해서 결과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됐다'라고 비꼬는 것처럼 들리네?" 하고 발끈한 것이다.] 선조에게 명량 대첩 이듬해까지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 끈질기게 압박하여, 이전의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게 도와주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